1년 6개월의 군 복무를 마친 기념으로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마침 은퇴 후 여행을 즐기시는 고모와 함께할 기회가 생겨, 제 인생 첫 미국 서부 8박 10일 여정에 오르게 되었죠.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앞두고 잠시 쉬어갈 생각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했습니다. 그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 나누고 싶어 이렇게 기록을 남깁니다.
목차
LA: 낯선 땅에 내딛는 첫걸음 (베니스 비치)
LA 공항에 도착해 델타항공 로고를 보니 드디어 미국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시작된 입국심사는 긴장의 연속이었죠. 요즘 트럼프 행정부 이후 입국심사가 까다로워졌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혹시나 입국하지 못할까 걱정했습니다.
입국심사 줄은 길었고, 한 시간을 꼬박 기다려야 했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다가가니 여권을 가져가 여행 기간과 소지한 현금 액수를 물었고, 지문 확인 작업을 거치니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입국심사 카운터는 30개나 되는데 운영하는 곳은 3~4곳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가이드님께 듣기론, 당시 행정부의 정책 변화로 이민국 직원 상당수가 불법체류자를 단속하는 야외 근무로 빠지면서 공항 인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베니스 비치였습니다. 근처에 '머슬 비치'가 있어 그런지 생각보다 자유로운 복장의 사람들과, 곳곳에서 운동하는 근육질의 사람들이 많아 신선한 충격과 함께 운동 자극을 받았습니다. 높은 파도 위에서 서핑하는 사람들, 잘 조성된 보드장에서 묘기를 부리는 보더들로 해변은 활기가 넘쳤습니다.




기내식 외에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배가 고팠지만, 처음 보는 상점 주인에게 영어로 주문할 용기가 나지 않아 결국 시도조차 못 하고 돌아섰습니다.
솔뱅: 동화 속 마을에서의 작은 성공
다음으로 이동한 솔뱅은 동화 같은 유럽풍 마을이었습니다. 이곳은 여행 전 많이 찾아봤던 터라, 계획대로 스테이크를 먹고 제가 생각해 둔 포토 스팟에 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유명한 'Olsen's Danish Village Bakery'를 찾아갔지만 너무 멀어서, 대신 'Mortensen's Danish Bakery'에서 쿠키 상자를 샀습니다. 35,000원이라는 비싼 가격과 혼자 먹기엔 많은 양에 놀랐지만 맛은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영어로 주문에 성공했다는 점이 뿌듯했습니다. 예쁜 기념품 가게가 많아 둘러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해 발길을 돌려야 했던 아쉬움도 남습니다.
영화 '더 록'과 군 복무에 대한 단상
1일차 숙소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영화 '더 록'을 봤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된 앨커트래즈 섬을 다음날 방문할 예정이라 더 흥미로웠죠. 특히 저처럼 군인이었던 사람으로서, 전사한 부대원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위해 가스 미사일을 탈취하고 인질극을 벌이는 악역의 서사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훈련병 사망 사건 이후 군대 내의 문제들이 사회적 관심을 받게 되었지만, 그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희생이 얼마나 많았을지 상상도 안 됩니다.
제가 복무했던 부대에서도 상하차 작업이나 창고 정리를 하다 허리를 다치거나, 무릎에 물이 차고, 발목 인대가 파열되어 수술까지 받아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동기들이 있었습니다. 군대는 총기뿐 아니라 수소나 에탄올 같은 위험물과 많은 화력 무기들을 다루는 등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부상 시에 그에 대한 보상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현실들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 설렘, 갈등, 그리고 두 개의 다리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길, 버스 안에서는 작은 소동도 있었습니다. 한 어르신께서 버스 탑승 순서를 두고 가이드에게 목소리를 높이셨습니다. 일행 중 몇 명이 먼저 와서 줄을 섰다고 나중에 온 다른 일행이 앞으로 오는 것은 불공정하며, 같은 일행이라도 온 순서대로 타는 것이 맞지 않냐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어서 라스베이거스 선택 관광을 정할 때 또다시 갈등이 불거졌습니다. 가이드가 멀미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경비행기 투어 대신 쇼 관람으로 유도하자, "나는 예전에 그 쇼를 봤는데 재미없었다. 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사항을 마음대로 정하려 하느냐"라며 강하게 항의하셨습니다. 덕분에 저도 원했던 경비행기 투어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분의 날 선 태도에 버스 안 분위기는 내내 삭막했습니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에 들어설 때, 우리는 베이 브리지(Bay Bridge)를 통해 도시로 진입했습니다.


총 길이 약 7.18km에 달하는 이 다리는 샌프란시스코의 또 다른 상징인 금문교보다 훨씬 깁니다. 상층과 하층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복층 구조로 되어 있죠. 반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금문교(Golden Gate Bridge)는 약 2.7km 길이로, 특유의 '인터내셔널 오렌지' 색상은 원래 부식 방지용 페인트였지만 그 색이 아름다워 그대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자유와 몰락이 공존하는 도시
샌프란시스코는 '자유로운 영혼의 도시'라는 별명에 걸맞은 곳이었습니다. 특히 성소수자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는 캐스트로 거리를 지날 때는 그 자유로운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죠.

원래 무지개 깃발은 8가지 색이었지만, 생산 문제로 색이 줄어 현재는 우리가 아는 6색(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깃발이 사용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 CES라는 국제전자제품박람회 관련 영상을 보며 알게 된 '웨이모'와 '죽스' 같은 자율주행차에 관심이 많았는데, 실제로 길 위에서는 운전자 없이 스스로 달리는 무인 택시 웨이모가 정말 자주 보여 신기했습니다.

아마존의 '죽스'도 보고 싶었지만 아직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서비스를 시작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기술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팬데믹 이후 원격 근무가 정착되고 높은 세금과 임대료, 치안 문제 등이 겹치면서 오라클, 테슬라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는 '탈샌프란'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홈리스, 마약, 절도 같은 문제들이 늘어나며 도시의 치안이 나빠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자유로운 영혼의 도시'가 가진 또 다른 얼굴을 보게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명소 탐방: (트윈 픽스, 케이블카, 팰리스 오브 파인 아트, 페리 빌딩, 유람선, 피어 39)
트윈 픽스에 올라 샌프란시스코의 전경을 한눈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명물인 안개가 너무 자욱해 풍경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제야 샌프란시스코에 '안개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고, 심지어 안개에 '칼(Karl the Fog)'이라는 애칭까지 붙여준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케이블카를 타러 갔습니다.




- 지하의 케이블: 도로 밑에는 시속 약 15km로 계속 움직이는 강철 케이블이 있습니다.
- 클램프 조작: 운전자는 '클램프'라는 집게 장치를 수동 레버로 조작해 이 케이블을 잡으면 차가 움직이고, 놓으면 멈추는 원리입니다.
다음으로는 페리 빌딩에 들러 선착장에 들어오는 페리를 구경하고, 건물 안에 있는 블루보틀 커피로 향했습니다. 한국에도 지점이 있지만, 이곳 원조 매장에서 파는 오트밀 라떼가 맛있다는 추천을 보고 주문했는데, 정말 고소하고 맛이 좋았습니다.


커피를 마신 뒤에는 샌프란시스코의 바다를 직접 느끼기 위해 골든 게이트 베이 크루즈 유람선에 올랐습니다.




유람선은 금문교를 지나 앨커트래즈섬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코스였습니다. 이때 배 오른편에 자리를 잡으면 금문교와 앨커트래즈를 더 잘 볼 수 있다는 팁 덕분에, 최고의 자리에서 멋진 풍경을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피어 39에서는 수많은 요트와 여유롭게 햇볕을 쬐는 바다사자들을 구경하고 명물인 크램차우더를 맛봤습니다.




솔직히 제 입맛에는 해물 맛 나는 짜고 신 죽이어서 손이 잘 가지 않았고, 같이 나온 생선튀김과 감자튀김이 더 맛있었습니다. 짧은 식사를 마치고 근처 트레이더 조에 들러 기념품으로 에코백을 사고, 기념품 샵에서 마그넷도 하나 구매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뭐가 예쁜지 몰라 아무거나 샀다가, 나중에 소살리토에서 더 예쁜 마그넷을 발견하고 후회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 신전 양식의 팰리스 오브 파인 아트는 그 아름다움 덕분에 결혼식 명소로도 유명했는데, 마침 야외 결혼식 리허설이 한창이었습니다. 원래 1906년 대지진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부흥을 알리기 위해 열린 1915년 엑스포의 임시 건물이었지만, 시민들의 요청으로 보존되었다는 역사를 알고 보니 더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활기 넘치는 LA의 해변부터 동화 같던 솔뱅, 그리고 자유의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를 품고 있던 샌프란시스코까지,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도시들을 경험하며 미국 서부의 첫인상을 정리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도시를 벗어나,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자연,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겪었던 경이로운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